- 제목
- 생명의 역사37: 타웅 어린이 vs. 필트다운 어른
- 작성일
- 2020.08.18
- 작성자
- 시스템생물학과 관리자
- 게시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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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사람이 가진 특징 중 동물과는 다른 것을 들라면 단연 커다란 뇌입니다. 큰 뇌를 구성하는 1000억개 신경세포가 만드는 100조의 시냅스망 활성이 사색, 도덕심, 양심, 자의식 등으로 나타납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어떻게 우리가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해 5개의 특징을 들어 설명합니다(http://www.nhm.ac.uk/discover/how-we-became-human.html). 이족보행(bipedalism), 커다란 뇌(big brain), 남녀 별차이 없는 몸크기(similar sized sexes), 긴 어린시절(childhood), 그리고 섬세한 손아귀 힘(a precision grip)입니다. 요즈음 과학자들은 이러한 사람만의 특징(파생형질, derived characters)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초기 호미닌이 직립상태로 두발걷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한 세기 이전 과학자들은 ‘생각하는 뇌’가 제일 먼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서 비롯된 초기 호미닌 화석 논쟁과 과학사 희대의 사기사건 하나를 다루겠습니다.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돌다 온 젊은 다윈은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과 동물이 공통의 조상을 가졌다면, 인간은 어떻게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됐을까?’ 당시 감히 입밖에 내기에는 불경스런 질문을 품고 있던 차에 다윈은 런던 동물원에서 사람처럼 길러지는 어린 오랑우탄을 관찰합니다. 사실 어린시절 오랭은 다 컸을 때보다 사람에 가깝습니다. 다윈은 조련사를 따르는 오랭의 행동에서 엄마를 따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았고, 거울에 비춰진 자기 모습에 신기해 하며 무엇인가 알아내려는 듯한 행동에서 오랭도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다윈의 이러한 오랭 관찰에 힌트를 얻은 한 발달심리학자는 동물에게 거울을 보여주고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임을 아는가를 실험합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의식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theory of mind). 거울 실험을 통해 유인원 4종(오랭, 고릴라, 침프, 보노보), 코끼리, 까치는 자의식이 있지만, 우리가 영리하다고 아는 개는 아닙니다. 어린아기는 3살 정도에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자기인줄 압니다. 오랭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다윈은 20년 후인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하고, 이어서1871년에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이란 책을 출간합니다. 거기서 다윈은 인간과 유인원이 공통 조상을 갖고 있고, 아프리카에서 진화했다고 기술합니다. ‘종의 기원’ 출간 때부터 당대 사람들은 인간의 지위가 원숭이 수준으로 격하되는 데에 대해 격론이 심했던 터라, 다윈의 그러한 명시적인 선언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인류의 탄생지였다는 주장은 사람들을 한번 더 불편하게 했습니다.
1856년 ‘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전에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독일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은 진지하게 인류 조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네인데르탈의 뇌용량은 사피엔스와 비슷하거나 조금 컷습니다(15000 cc). 1907년 뇌 크기가 현대인과 비슷한 하이델버젠시스가 또 독일에서 발견됩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의 공동 조상으로 간주됩니다. 문제는 이보다 이전 1892년에 네덜란드 의사 듀보아(Dubois)에 의해 발견된 ‘쟈바인’입니다. 하반신은 현대인과 유사한데 뇌의 용량은 900 cc 정도로 침팬지(350 cc)와 현대인의 중간 정도였습니다. 듀보아는 쟈바인은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았다고 주장합니다. 쟈바인은 나중에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로 명명되며, 1930년 초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 조상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고인류학자들은 작은 뇌를 소유한 쟈바인을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윈을 배출한 영국의 과학자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또한 이들은 잃어버린 조상을 찾는 경쟁에서 뒤쳐져 자존심이 상해있었고 또 조바심도 있었습니다.
1912년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이자 법률 소송대리인 도손(Charles Dawson), 프랑스 예수회 신부이면서 화석학자인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 그리고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수석 지질학자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는 사람과 비슷한 두개골에 유인원 턱을 가진 화석을 발견했다고 지질학회에 발표합니다. 도손이 필트다운 지방 자갈 채석장에서 발견한 화석이기에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이라 하였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그 유골은 인간 머리뼈에 유인원 아래턱뼈를 붙인 조작품 같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사람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뇌가 먼저 발달했을 것’이라는 그들의 굳은 믿음을 증거하는 화석이라 여겼습니다. 곧이어 소수의 비판을 잠재우는 송곳니 화석과 필트다운인이 썼을 도구 화석이 추가됩니다. 그리고 유골에 Eoanthropus dawsoni ("도슨이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란 학명이 부여되고, 대대적인 언론 홍보와 함께 전시용 복제품이 전세계 박물관에 배포됩니다.
1925년 필트다운인과 상반된 ‘뇌는 유인원, 아래턱은 사람’ 화석이 등장합니다. 호주 출신의 다트(Raymond Dart)는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해부학 교수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24년에 행운을 맞이합니다. 그의 집으로 어느 석회암 채석장 인부가 캐낸 두개골 화석이 배달된 것이죠. 해부학 전문가 첫눈에 보통 예사로운 화석이 아님이 들어옵니다. 침팬지 정도의 뇌 크기에 사람의 작아진 이빨을 가진 두개골 화석이었죠. 다트는 3개월 동안 뜨개질 바늘로 화석 주변 돌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제거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침내 200-300만년을 땅 속에 묻혀있던 ‘반 유인원 반 인간’ 두개골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는 5-8세 정도의 타웅(Taung) 지방 아이였습니다(타웅 어린이). 다트는 회상합니다. “나만큼 이렇게 자식(타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부모가 수백만년 이래 있었을까?” 그리고 자랑스러운 자기 자식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라 이름 짓고, 곧장 논문을 작성해 네이처에 보냅니다.
세상의 반응은 다트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첫째, 당연히 필트다운인 두개골과 반대인 점이 문제였습니다. 둘째, 일부 비판가는 타웅 어린이 두개골에서 인간처럼 보이는 특징들은 잘못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완전히 다 자라면 사람의 특징을 사라지고 유인원의 특징이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다트는 특이한 유인원 새끼의 두개골을 발견했으며, 거기서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죠. 셋째,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인류의 기원을 말해주는 화석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유라시아에서 발견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같은 시기에 베이징에서 발견된 화석은 그러한 기대를 지지해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타웅 어린이는 아닙니다. 넷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학명은 고고학 작명 규칙을 무시한 해부학 전공의사의 멋대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폄하했습니다. 이에 낙심한 다트는 고인류학 분야를 등졌습니다. 그러나 30년 후인 1953년 필트다운인 화석이 사기극으로 드러나면서, 타웅 어린이 화석은 고고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보물로 인정됩니다.
필트다운 어른은 타웅 어린이의 앞날을 방해했지만, 타웅 어린이는 필트다운 어른의 정당성에 일격을 가했습니다. 1940년대 후반 불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법이 개발되면서 필트다운인의 유골이 불과 몇 백년 전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됩니다. 1953년 영국 자연사박물관과 런던대학 과학자들은 필트다운인 유골은 사람의 머리뼈 조각에 오랑우탄의 아래턱뼈 조각들을 짜맞춰 놓은 것이라 밝혔습니다. 채 720년을 넘지 않은 뼈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착색되어 있었고, 유인원 송곳니는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보이게 하려고 갈아낸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의 확증편향적 사고가 필트다운인의 객관적 검증을 방해했으며, 그들의 국가주의 역시 한 몫 했습니다. 인류 조상 화석 발견이 전무하였던 영국에서는 필트다운인 발견 사실 자체를 큰 성과로 여겼기 때문에 주위의 비판을 애써 무시한 것이죠.
필트다운인 사건은 과학역사상 가장 큰 사기사건 중 하나입니다. 사건의 주범으로 의심받던 도슨은 1916년 패혈증으로 사망한 뒤였기에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묻혀버렸습니다. 우드워드는 1961년 사망했는데, 그의 연구실에서 조작된 뼈들이 그의 조수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송곳니를 발견한 드 샤르뎅도 사기에 가담했다고 의심받습니다. 2012년 자연사박물관 연구팀은 누가 범인인지를 확실히 하고자 100년 전의 조작품을 다시 꺼냅니다. 그 당시엔 가능하지 않았던 DNA 염기서열 분석과 분광분석법을 동원됩니다. 2016년 연구팀은 필트다운인 두개골은 도슨 한 명에 의해 날조된 조작품임을 영국 왕립학회지에 발표합니다(1, 2). 사건의 진상과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용서는 신의 몫이지만 진실을 밝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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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e Groote I. et al. 2016 New genetic and morphological evidence suggests a single hoaxer created ‘Piltdown man’. R. Soc. open sci. 3: 160328. http://dx.doi.org/10.1098/rsos.160328